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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도시 울산을 말하다]신라시대 축성 추정, 개지변성→계변성→신학성→학성으로

기사승인 2015.12.02  17:5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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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신라시대 울산을 지키고, 고려시대 울산을 다스린 계변성(戒邊城) : 제1편

   
▲ 충의사에서 남쪽 증성(울산왜성)을 향해 바라본 전경.

1424년 11월 세종(世宗)이 변계량(卞季良)에게 지리지(地理誌) 편찬을 명함으로써 전국을 포괄하는 지리지 편찬이 시작되었다. 이듬해(1425)에 <경상도지리지>가 전국 최초로 편찬되었는데, 이것은 훗날 <신찬팔도지리지>를 거쳐 <세종실록지리지>를 완성하는데 근간이 되었다. 이 책 중 ‘경상도 울산군’ 편의 첫줄에 ‘울산군은 본래 계변성(戒邊城)이었는데, 신라 때 신학성(神鶴城)으로 이름을 고쳤다. 그 이름이 학성인 것은 천복 원년(901)에 한 쌍의 학(鶴)이 온통 금으로 된 신상(神像)을 물고 계변성 신두산(神頭山)에서 울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서 신학(神鶴)이라고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울산고을을 지칭하는 ‘계변성’
신라시대 신문왕이 만든 군대
개지극당이 머무르며 왕도 호위
고을의 동쪽 5里 신두산에 위치
지금 충의사 자리에 위치한듯

   
▲ 학성지 울산지도에 표현된 신학성.

그리고 조선 성종(成宗)이 기존의 지리지를 바탕으로 다시금 <동국여지승람>이라는 지리지를 편찬케 하였는데, 이 책의 울산군 편에서 ‘신학성(神鶴城)은 즉 계변성(戒邊城)이다. 고을(필자 주; 울산 동헌을 뜻함)의 동쪽 5리(里)에 위치하고 있다’는 내용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두 문헌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신라(新羅) 어느 시기에 계변성이 축조되어 당시 울산고을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사용되었고, 신라 효공왕 5년(901)에 신학성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그 성(城)은 신두산이라 불리는 곳에 있었으며, 신두산은 울산동헌으로부터 동쪽으로 5리(里)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 당시 계변성이 울산 고을을 대표하는 이름이었으니, 고을의 수령이 머물고 있었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


한편, <고려사> 에는 ‘신학성(神鶴城) 혹은 계변성(戒邊城), 개지변(皆知邊), 화성군(火城郡)이라 하고, 고려 성종이 학성(鶴城)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는 계변성의 또 다른 이름으로 ‘개지변(皆知邊)’이 등장하는데, 이는 ‘계변’을 늘여서 부른 것으로 그 이전의 원래 이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러한 이름들은 고려 성종이 ‘학성(鶴城)’이라고 별칭을 지어 주면서 최종 정착하게 되었다.

   
▲ 항공사진에 표기해본 계변성 위치.

하지만, 계변성의 원래 이름이었던 개지변성(皆知邊城)이 신라시대의 언제 쯤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따라서 신라의 역사에 대해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들추어 볼 필요성이 생긴다.

<삼국사기> 40권의 무관(武官) 편에 ‘개지극당(皆知戟幢)은 신문왕(神文王) 10년(690)에 처음 두었다. 옷 색깔은 검정, 빨강, 흰색이다. (군대의 대장) 개지극당감(皆知戟幢監)은 총 4명으로 왕도(王都)를 아울러 호위한다’는 기록이 있다. 개지극당이란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이 690년에 만든 군대로, ‘왕도(王都)를 아울러 호위한다()’고 한 것을 보면, 신라의 서울이었던 경주와 그 인근을 호위하였으며, 대장을 개지극당감이라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극(戟)이란, 끝이 두 갈래인 창(槍)과 유사한 무기를 뜻하고, 당(幢)은 깃발로 곧 군대를 뜻한다. 즉 개지극당은 ‘개지’라는 이름으로 극(戟)을 주로 사용하는 군대라는 뜻이다. 경주지역을 벗어나서 과거 신라의 국경 이내에 ‘개지’라는 지명을 간직한 곳은 오직 울산지역 밖에 없다.

이를 보면, 개지극당이라는 군대가 690년 직후 어느 시기에 울산의 신두산(神頭山) 일원에 성(城)을 만들고 머물렀으며, 이 때문에 ‘계(개지)변성’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계변성의 연혁은 ‘개지변성’으로부터 출발해 ‘계변성’으로 이름이 바뀌고 뒤이어 ‘신학성’이 되었고, 고려시대에 들어서 ‘학성’으로 정착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처음 만들어진 시기는 개지극당이 창설된 690년 전후시기로 이해할 수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개지극당 군대의 옷 색깔이 검정, 빨강, 흰색인데, 이는 학(鶴, 두루미)의 몸 색깔과 같고, 계변성의 이름이 뒤에 학성(鶴城)이 된 것은 우연치고는 너무 절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이 계변성은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었을까?

앞서 잠시 언급한 것과 같이 1500년대 초기의 우리 조상들은 동헌으로부터 동쪽으로 5리(里) 떨어진 신두산(神頭山)에 계변성이 위치한다고 하였다. 조선 세종(世宗)이 나라 전체의 지리지를 편찬하려는 의지가 강했듯이, 조선시대 울산도호부사로 왔던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도 울산의 지리에 대해 총정리하기 위해 1749년 울산 최초의 읍지(邑誌)인 <학성지(鶴城誌)>를 만들었다. 이 <학성지>에 수록된 울산지도(蔚山地圖)에는 <경상도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당시 울산동헌인 일학헌(一鶴軒)의 동쪽에 신두산(神頭山)이 그려져 있고, 그 산의 동쪽 끝 부분에 ‘신학성(神鶴城)’이라고 적혀 있는데, 신학성은 계변성이 변한 이름이니 위의 문헌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그 주변에 그려진 병영성과 울산왜성, 구강서원(옛 반구동의 동천가에 있을 때의 구강서원) 등을 볼 때도 그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데, 지금의 충의사가 위치한 곳이 바로 계변성이다. 또한 <학성지>를 제외한 조선시대의 울산을 표현한 지도들도 그 대부분이 이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한편, 지도의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 문헌 기록들도 있다. <문헌비고(1770)>에는 ‘계변성은 고을의 동쪽 5리에 있고, 증성(울산왜성)도 고을의 동쪽 5리에 있다’하였고, <울산읍지(1902)>에는 ‘증성은 고을의 동쪽 5리에 있고, 신학성은 증성(울산왜성)의 북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외의 여러 읍지에도 대부분 이와 유사한 내용이 담겨 있다. 즉 조선시대 국가 차원에서 편찬한 지리지(地理誌)와 울산지역에서 만든 읍지(邑誌)들 대부분이 지금의 충의사가 있는 곳을 ‘계변성’이라고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계변성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았다. 다음 편에서는 이 계변성이 어떻게 사용되었고, 어떻게 남아있는지 살펴보고, 왜 우리가 계변성을 잊지 말고 가꾸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이창업 울산광역시 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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