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화폐로 온 세상이 떠들썩
윤리적 정당성이 배제된 채
일확천금만 좇는다면 위험천만

▲ 김상곤 전 울산시 감사관

가상의 세계는 오감으로 느낄 수 없다. 보고 듣거나 접촉할 수 있는 실체가 아무것도 없는 머릿속의 세계다. 이 머릿속의 세계가 오감으로 만들어 진 실제 세계를 위협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과학이 만들어 낸 가상의 세계에 익숙하지 않는 사람들은 가상의 사이버 세계가 우리의 오감을 만족시켜 주는 보조적이고 모방적인 소프트 프로그램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가상이라는 형용사가 화폐 앞에 붙어도 그것은 게임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치부하고 지낸다. 요즈음의 언론 보도나 주위의 수군거림을 보면 이러한 인식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인가를 알 수 있다.

우리 주위에도 누가 가상화폐에 얼마를 투자해 얼마를 벌었다는 소문은 벌써 여러 차례 돌았다. 아예 얼마를 투자하고 꿈에 부풀어 있는 사람도 여럿 보았다. 은퇴시기를 넘긴 사람들의 주위가 이러하다면 현실의 변화에 예민한 젊은이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열풍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이 뭔지는 몰라도 정부가 대책에 골몰하고 있는 것을 보면 무언가 심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이나 예측은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일반 대중은 아예 상관없는 일로 외면해 버릴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하지 않고 외면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대단히 위험한 일일지도 모른다. 정부나 국회가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짐작하지 못하고 그냥 방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상화폐의 거래 경로나 거래 수단이 화폐가 유통되는 고전적인 시장시스템을 가지고는 통제가 어려운 수준이라고 하니 쉽게 끝이 날 강 건너 불은 아닌 것 같다.

가상의 세계에 대한 욕구가 현대 과학의 시대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인간은 선사시대부터 눈앞의 세계와 다른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 왔다. 인류의 가장 오랜 이야기인 신화는 위험하고 복잡한 현실의 질서를 가장 단순화한 상상의 세계다. 이 상상의 세계를 통해서 무한히 반복되는 시간에게 원인과 결과의 질서를 부여하고 닿을 수 없는 하늘의 별들을 두려움 없이 바라볼 수 있었다. 고대의 신화적인 인식뿐만 아니라 합리성을 자랑하는 현대인의 사유도 아직 종교의 도움 없이는 현실의 세계를 정확히 해석하지 못한다. 철학적 사유도 마찬가지다. 서양철학을 현대적인 사유체계로 인도한 칸트도 평생 동안 세상의 실체에 다가가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감성과 지성, 그리고 이성의 영역과 역할을 밝혀냈다. 신화와 종교의 질서를 넘어서 인간의 눈으로 본 세상을 그리고자 했던 그도 결국 사물의 실제적 모습은 발견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 우리가 실제라고 생각하는 눈앞의 세상도 결국 인간 감성의 프리즘을 통하고 지성의 범주로 한정된 가상이라고 고백했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마지막 능력인 이성에서 인간의 위대함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과학이 미신과 신화를 밀어내고 인류를 문명과 이성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만들어 왔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곧 세상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힘이고 그 자체에서 윤리적 정당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자부해 왔다.

가상화폐도 그 바탕에는 블록체인이라는 과학적 지식이 전제돼 있다고 한다. 가상의 세계를 벗어나고자 인간이 발견한 과학적, 합리적 지식이 다시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것이 인간을 더 자유롭고 풍요롭게 할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상의 세계에 익숙해져 가고 있고 또 익숙해 져야만 할 것 같다. 그러나 우려는 있다. 가상의 세계로 가는 길이 아무런 윤리성도 확보하지 못한 일확천금의 길이라면 그 길은 위험하다. 우리는 발전만을 위해 살아가진 않는다. 나와 이웃이 공유된 사회질서 속에서 이해 가능한 방법으로 삶을 영위해 가길 바랄 뿐이다.

김상곤 전 울산시 감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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