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편 (44)마침표

▲ 우석 이후락의 문중 산소. 우석의 문중 산소는 산소 위로 지나가는 고압선 때문에 산소 주위 나무들이 벌목을 해야 할 위기를 맞아 주위 경관이 많이 훼손 될 것으로 보인다.

해방전후 독립운동·좌우익 투쟁속
많은 인물들 명멸했지만 기록 없어
울산의 전설들, 역사로 재탄생

울산을 빛낸 인물부터 악인까지
본 글 통해 250여명 이상 언급
전국각지·일본까지 오가며 취재

질타와 격려속 조심스레 글 써
미처 언급하지 못한 인물도 있어
문화계 박영출, 광폭적 조명 필요

‘인물로 읽는 울산유사’가 300회로 마침표를 찍는다. 신문스크랩을 뒤져보니 처음 연재를 시작했던 날이 2012년 4월9일로 6년이 넘는 대장정이었다.

필자가 이 글을 쓰려고 생각한 것은 서울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할 때였다. 1982년부터 조선일보는 ‘길따라 발따라’를 주 1회 연재했다. 내용은 서울의 각종 유적지와 옛 인물들의 행적을 찾아내어 독자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필자가 서울의 궁궐과 왕릉 그리고 우리나라 근현대사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 글을 통해서다. 이 글은 처음에는 김성한 작가가 1년 정도 썼고 나중에는 이병주 작가가 1년 동안 연재했다.

이 글은 독자들의 호응을 얻어 연재 후 3권의 책으로 발간되었고 지금도 이 책이 나의 서재에 소중히 보관되어 있다.

울산에 온 후 정신없이 살다보니 한동안 이런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잊고 살았다. 2004년 언론계를 떠난 후 문득 다시 옛 생각이 났다. 울산에서 언론생활을 하다 보니 울산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후 독립운동과 좌우익의 격한 투쟁 속에서 많은 인물들이 명멸했지만 이들의 얘기가 전설로만 남아 있고 기록이 없었다.

과거의 전설을 역사로 만들다보니 6년이 흘렀다. 그동안 이 난을 통해 나타난 인물들이 250여명이 훨씬 넘는다.

이들 중에는 박병호 김기오 김활천 이후락 등 울산을 빛낸 인물들도 있었지만 우리 민족이 일제의 압박 속에 신음하고 좌우익으로 갈라져 이념 투쟁을 벌일 때 무고한 양민들을 못살게 굴었던 노덕술과 백인기와 같은 인물들도 있었다.

시대적으로 우리보다 훨씬 앞서 살았던 이들의 행적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주위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창식 이상숙 이철응 이일성 이병우 김명규 이채관 최종두 설성재 김규형 우정항 이용호 김관 장백춘 박임금 심완구 김팔용 김성렬 오태룡 고동원 김지수 김기석씨가 도와주었고 이정신과 김홍명 여사도 옛 전설을 확인해 주었다. 이들은 얘기만 들려준 것이 아니고 현장 안내까지 해 주었다.

도움을 준 인물은 이들 만이 아니었다. 서울의 권정식 제독, 최해조 이상걸도 많은 자료를 제공했다. 아쉽게도 김창식 이상숙 이철응 이병우 이일성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많은 인물을 취재하다보니 많은 곳도 찾게 되었다. 서울은 기억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여러 번 드나들었고 안동과 거창 심지어는 태안과 파주 제주도까지 다녀왔다. 일제강점기 울산의 거부 김좌성의 아들 김재문을 취재할 때는 그가 자녀들의 공부를 위해 여러 번 들렸던 일본 하기시까지 갔다 오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발간되었던 신문도 도움을 주었다. 동아·조선의 기자들은 요즘처럼 취재와 보도가 쉽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애국하는 마음으로 기사를 써 역사의 기록을 남겼다. 특히 조선일보 자료실 김명환 기자는 <조선일보 70년사>를 복사해 부쳐주면서 많은 자료를 제공했다.

이 연재물에 가장 많이 올랐던 인물은 해방 후 울산을 위해 많은 일을 했던 우석 이후락으로 8~9회나 연재되었다. 다음으로 60~70년대 군사독재 시절 울산에서 민주화 운동을 벌였던 김재호 박사와 해방 직후 울산에서 문학 활동을 벌였던 이상숙도 3~4번 연재되었다. 김재호 박사와 이상숙은 이 글이 연재되는 동안 비도 세워졌다.

이 글이 연재되는 동안 질타와 격려도 적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기록물을 중심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많은 위험이 뒤따랐다. 사실에서 벗어난 내용에 대한 지적은 물론이고 자신들의 판단과 다를 때는 비난도 했다. 정정 요구는 보통이고 때로는 언론중재위에 소송까지 하겠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옛 인물 중심으로 글을 쓰다보니 증언자가 많지 않았고 울산이 개발되면서 현장이 대부분 사려져 어려움이 있었다. 이 때문에 항상 살얼음을 걷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2016년 울산검찰청장으로 울산에 와 일 년 정도 머물렀던 한찬식 검사장은 이 글을 빼지 않고 읽었던 독자다. 서울 도심 출신으로 울산에 부임했던 그는 이 글을 통해 울산을 알게 되었다면서 수원으로 임지를 옮기기 전에는 식사대접까지 했다. 순수문학이 아닌 이런 잡문에 관심을 가져 준 한 검사장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이 글이 본의 아니게 타 신문에 이용되기도 했다. 2015년 6월8일 ‘고태진과 울산상업은행’이라는 제목으로 당시 권력의 실세였던 이후락과 친했던 고태진의 경제활동을 쓴 적이 있다. 그런데 2017년 1월9일 한겨레신문은 이 글을 바탕으로 ‘강남 땅 투기 원조는 박정희’였다는 제목 아래 고태진이 이후락의 금고지기 역할을 했다는 내용의 글을 1면 톱으로 올렸다.

해방 후 울산의 중심인물로는 정치 이후락, 경제 정주영, 문화 박영출, 언론 이철응, 체육 설성대를 들 수 있다. 이중 한 번도 이 글에 언급되지 못한 인물이 박영출 어른이다.

60년대 초 울산문화원장에 취임했던 그는 30여년이 훨씬 넘는 동안 문화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울산 문화의 초석을 놓았다. 그런데도 그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것은 그의 문화적 업적이 너무 커 한 두 번의 글로 정리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그에 대해서는 광폭적인 조명이 필요할 것으로 본다.

60~70년대 서민들과 함께 살았던 해술이는 독자들의 호응이 컸다. 그가 중동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장생포를 드나드는 마도로스들과 영어대화를 했다는 것은 그의 글이 보도 된 후 알았다.

해술과 비슷한 인물이 감포 영진이다. 60~70년대 울산 도심에서 주차 요원으로 활동했던 영진이 역시 아직 울산사람들 중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해술의 기사가 나간 후 영진의 행적을 궁금해 하는 독자들이 많았다. 따라서 당시 그와 삶을 같이 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수소문 해보았지만 그가 감포 출신이 아니었다는 사실 외에는 별다른 얘기를 듣지 못해 연재하지 못했다.

이 글의 마지막도 그동안 가장 많이 연재되었던 우석 이후락의 얘기로 끝맺어야 할 것 같다.

우석은 행적에 비해 흔적이 너무 일찍 울산에서 사라지고 있다. 심지어 문중에서 우석 기념관으로 만들려고 했던 생가까지 남의 손으로 넘어갔다.

최근에는 우석의 부친이 묻혀 있는 산소 나무까지도 벌목이 될 위기에 있다. 우석의 부친 석승(錫承) 어른은 사망 후 부산 당감동에 묻혔다가 우석이 출세한 후 고향 석천으로 산소가 이장되었다.

당초 이 산소를 당감동에서 석천으로 이장 할 때 이름난 지관이 산소를 옮기면 집안이 더 번창할 수 없다면서 말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석천으로 왔다. 이후 그의 산소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의정부까지 갔다가 2~3년 전 다시 석천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얼마 전 한전이 산소 위로 지나가는 고압선 때문에 화재가 날 우려가 있다면서 산소 인근의 나무를 벌목해 달라고 문중에 지시해 후손들이 고심하고 있다. 고압선은 우석이 권좌에 있을 때 세워졌다. 문중 사람들은 고압선이 나중에 화가 될 것을 염려해 서울로 우석을 찾아가 산소 위로 고압선이 지나가지 못하도록 막아달라는 요청을 했다.

그러나 우석은 문중 산소 때문에 국가 경제 발전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된다면서 문중 어른들의 요청을 거부해 고압선이 지금도 문중 산소 위를 지나고 있다. 우석은 현재 대전 현충원에 묻혀 있지만 이 소식을 듣는다면 마음이 편치 못할 것 같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최근 석천 산소에 가보았더니 얼마 전 의정부에서 이곳으로 다시 이장된 석승 어른의 산소가 있고 무덤 앞 상석에는 후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석승 어른은 위락 후락 거락 흡 등 4명의 아들을 두었다. 비석에는 이미 고인이 된 상환의 이름도 보였다. 90년대 경상일보 정치부 기자로 활발한 활동했던 상환은 석승의 장자 위락의 손자로 상환으로 보면 우석은 작은 할아버지가 된다. 우석은 평소 부친이 일찍 사망한 상환의 결혼식에도 참석하는 등 상환을 아꼈다. 언론계의 후배 상환의 이름을 보면서 인생무상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오랫동안 지면을 제공해 준 경상일보와 그 동안 원고 정리를 위해 수고했던 홍영진 기자 그리고 이 글을 애독해 준 독자들에게 감사한다.

지난 6여년간 매주 월요일마다 독자들을 찾아갔던 장성운의 ‘인물로 읽는 울산유사’가 300회를 끝으로 大연재의 막을 내림니다. 다음주(6월4일자)에는 장성운 작가와의 특별인터뷰를 통해 6년간의 집필동안 여러 소회와 막후이야기를 기사로 실을 예정입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이 지면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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