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준호 울산의대 울산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경제 불안정 삶의 기반 흔들고
정신장애등 여러요인 작용하면
함정에 갇힌 느낌 들게 할수도

자살예방 국가행동계획 발표에
맹독성 농약 생산 금지등 방안
결함 복구보다 임시 수리 그쳐
자살률 낮추기엔 근본적인 한계

자살, 예방에 주력하기 보다는
물질적인 풍요속, 정신적 결핍
우리 삶의 변화 다시 돌아봐야

국토를 태울 듯 뜨겁고 길었던 여름도 마침내 산들바람에 자리를 내주었다. 한여름을 보내고 내원한 분에게 하는 인사. 무더운 여름 어떻게 지내셨나요? 잠은 잘 주무셨는지요?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고 하면서도 몇 분의 표정은 금세 어두워진다. 더위는 지나갔지만 어려운 경제 사정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통계 숫자로 보도되던 높은 실업률은 진료실에서 현실적인 걱정과 불안으로 나타난다. 고민 끝에 희망퇴직을 신청한 사람, 손님이 없어도 다음 세입자가 없어서 폐업을 미루는 사람, 새로 구한 직장이 힘들어도 온몸으로 버티는 사람…. 울산, 특히 동구의 경제가 어렵다.

올해엔 자해로 인해 응급실을 찾는 환자도 부쩍 늘었다. 경제적 위기를 겪을 때마다 우리나라 자살률은 급속히 증가해왔다. 199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10명 정도로 세계 평균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1997년의 금융위기 이후 두 배로 늘더니 2003년 카드대란과 2008년 세계불황을 겪은 뒤 30명을 넘어섰다. 그 와중에 울산은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고른 경제수준을 바탕으로 전국의 시·도 중에 최저 수준의 자살률을 유지하였는데 최근 서서히 증가하여 2014년부터는 7개 광역시 중에서 중간을 차지하고 있다.

경제적 불안정은 삶의 기반을 흔들어 놓는다. 소득 액수보다 중요한 것은 일자리의 안정성이다. 미래가 불확실하면 사람들은 암담해진다. 일부는 삶을 포기하기로 마음먹기도 한다. 물론 경제적 곤란이 자살 사고의 직접적 요인도 유일한 이유도 아니다. 그 외에도 사회적 지지, 대인갈등,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장애 등 여러 요인들이 함께 작용한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자살 사고로 연결되는 가장 인접하고 핵심적인 요인으로 ‘함정에 갇힌 느낌’(entrapment)을 든다. 이제는 막다른 곳에 몰려서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다고 확신하는 상태다. 이 확신은 너무도 강력해서 고개만 들면 보일만한 해결책도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눈앞의 고민거리가 자신의 소중한 삶도 가족도 온통 덮어버려서 상식적인 판단 능력도 잃어버린다. 두 달 전 모 국회의원의 투신 소식은 큰 충격이었다. 그런 일로 극단적 행동까지 하리라곤 상상하기 어렵다. 이후에 진료실을 방문한 환자는 뉴스를 보고 자신도 그 심정을 공감하면서 비슷한 충동을 느꼈다고 고백하였다. 자살은 전염성이 있다. 섣불리 대응하다간 문제가 더 불거진다. 자극적 뉴스 보도도 지나친 추모 열기도 우려스럽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의 불명예를 씻기 위해 올해 초에 관계 부처 합동으로 ‘자살예방 국가행동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에 의하면 2022년 말까지 자살률을 20명 이내로 줄여서 자살률 만년 1위를 벗어나는 것이 목표다. 중요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나라 상황에 효과가 입증된 방법이 거의 없다.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국민의 관심을 끄는 이슈에 대해 정치인은 업적을 과시하고, 기업은 홍보를 원하고, 공무원은 실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생명 존중은 이와 반대로 신중하고 조용하게 접근해야 한다. 일례로 마포대교 ‘생명의 다리’ 사업을 돌아보자.

한강에서 투신 사고를 막기 위해서 서울시와 삼성생명은 2012년에 마포대교에서 자살 예방사업을 시작했다. 사람이 걸어가면 조명이 켜지면서 따뜻한 응원 문구가 보이도록 했다. 일반인들은 아름다운 조명과 멋진 문구를 반겼지만 정작 극단적인 결심을 한 사람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자살 관련 장소라는 인식만 각인됐다. 마포대교 투신 사고는 2011년 11건에서 2014년 184건으로 급속히 늘어나 자살 명소가 되었다. 일부 지방에서도 이 사업을 본떠서 교량에 자살예방 문구나 긴급 상담전화를 설치하였지만 소용없었다. 간혹 저수지나 바닷가에서 보는 자살방지 팻말도 효과가 있는지 의문이다. 지난달에는 전국 슈퍼마켓이 번개탄을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보관하여 팔고 포장지에는 자살예방 문구를 넣기로 하였다. 어떤 결과를 낳을지 궁금하다. 그간 시행한 대책을 보면 맹독성 농약 생산 금지처럼 자살 수단에 대한 접근 방지는 효과가 있었지만, 단순 홍보 문구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처럼 시행착오를 무릅쓴 온갖 시도는 소중하지만 그 한계 또한 명확하다. 총력을 기울여 고위험 대상자를 발굴하고 관리하고 상담하고 홍보하지만, 이런 방법으로 자살률을 얼마나 낮출 수 있을까? 배에 뭔가 중대한 결함이 생겨 물이 차오르는데 급한 대로 눈앞의 물만 퍼내고 있는 느낌이다. 이젠 근본적 질문을 할 때다. 도대체 1997년 외환위기는 우리 삶을 어떻게 변화시킨 것일까? 환란은 극복하였지만 삶은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후 몇 차례 경제 체질은 더 단련되면서 과거의 삶은 빠르게 멀어져갔다. 지금 우리가 익숙해진 삶은 일견 편리하고 풍족하지만, 휴식은 줄어들고 경쟁은 심해지고 양보는 드물어서 살기 팍팍하다. 그래서 드라마 ‘응답하라 1994’가 돌아갈 수 없는 고향처럼 뭉클하게 다가왔을까? 자살 예방에만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그간 우리 삶의 변화를 처음부터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안준호 울산의대 울산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