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동민 월간 퍼블릭아트 발행인

30년 전, 고향 목포에서 ‘대반동 야외설치미술제’를 개최했다. 목포청년작가회가 주최한 미술제에 필자는 회장 겸 감독으로 참여했고, 어떠한 지원도 없이 회비와 사비를 털어 열과 성을 다해 전시를 마련했다. 전시 주제는 ‘밀물’로, 고하도와 유달산을 배경 삼아 대반동 바닷가에서 야외설치작업 전시를 선보였다. 온갖 조롱과 비난을 감내해야 했지만, 일부 뜻있는 분들의 성원에 힘입어 목포 역사상 최초로 설치미술을 야외에 선보이면서 매스컴을 타는 등 꽤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아쉽게도 일회성에 그쳤다.

이후 2010년, 아름다운 순천만에서 ‘대지 미술제’를 준비했다. 공청회를 거치고 국비지원을 받았고, 조직위원으로서 세계적인 아티스트이자 대지미술의 어머니인 패트리샤 레이튼(Patricia Leighton)을 초청하는 등 야심차게 준비했다. 지역 행정가와 예술가를 설득하고 많은 논란을 거듭한 끝에 ‘순천만 대지 미술제’는 특별전으로 축소되어 어렵사리 행사를 진행했다. (공식 명칭은 순천 국제환경 아트페어 부대행사로 개최.) 결국 여러 이유에 부딪혀 지속하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하지만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순천만 정원박람회’가 생기면서 다시 ‘자연환경미술제’라는 이름으로 행사가 개최되었다.

필자는 그동안의 경험으로 설치미술과 대지미술과 인연이 깊어, 지난 2014년부터 2015년까지 ‘태화강 국제설치미술제’ 운영위원장 겸 감독으로 위촉되었다. 첫 해는 울산 태화강의 역사가 담긴 울산교에서 시작해, ‘연결된 미래’와 ‘닫힌 공간 너머’라는 연속적 주제로 행사를 운영했다. 미술제가 울산의 대표 브랜드로 자리 잡는 데 일조했다는 자부심과 함께 미래의 발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늘 지지했다.

지난 과거 이야기를 꺼내든 것은 무슨 일이든 시작하기가 어렵고 지속해 나가기는 더욱 어렵지만, 중단하고 폐지하기란 너무나 쉽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함이다. 최근 울산시의회가 국내에서 유일한 설치미술 콘텐츠이자 울산 유일의 국제 미술행사인 ‘태화강 국제설치미술제’의 예산을 일방적으로 없애는 바람에 미술제가 폐지된다는 보도를 접했다. 국내의 예술 행사 수가 늘어남에 따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필자가 충격을 넘어 분노에 휩싸인 이유는 지난 12년 동안 ‘태화강 국제설치미술제’가 울산작가들의 교류의 장이자 울산 시민의 대표적 문화유산으로 자부심을 주는 행사여서 만은 아니다. 독일이 자랑하는 ‘뮌스터 조각프로젝트’나 ‘카셀 도쿠멘타’처럼 세계인을 모으는 국제적인 행사로 발돋움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이다. ‘태화강 국제설치미술제’는 이미 경쟁력 넘치는 콘텐츠와 풍부한 가능성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미술제가 뚜렷한 이유를 밝히지 않고 논의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폐지된다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특히 대부분 지자체 의회는 문화예술행사를 시급한 현안으로 다루지 않는다. 문화에 대한 이해도 없이 경제논리로만 접근해, 보도블록 공사나 광장의 꽃단장만도 못한 예산으로 평가절하하거나 수익을 내지 못하는 행사로 폄하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또한, 지역 수장이 바뀌면 그동안 쌓아 올린 정책과 사업을 줄줄이 바꾸고 중단하는 등 역사와 전통을 무시하거나, 진영논리에 사로잡혀 거시적인 관점이나 공공성을 무시한 채 전임자의 그림자 지우기에 급급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사실 울산에서 감독으로서 설치미술제를 운영하면서 터무니없이 적은 예산, 시민들의 문화의식, 도시행정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만큼 울산은 미술 불모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국내 광역시 가운데 유일하게 시립미술관이나 제대로 된 문화공간이 없다. 역사·미술사적 가치를 배제하고 그동안 갖은 노력 끝에 지속한 국제설치미술제를 없애고 보자는 식의 발상이 안타깝고 한심하기 짝이 없다. 문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뜻있는 사람들과 기업, 관계자들의 희생과 노력의 결과이며 예술가와 시민들의 지지로 일궈낸 문화적 유산이다. 그만큼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되고 발효되어야 비로소 그 성과가 나타난다.

울산시가 태화강의 환경생태계는 잘 보전했을지 모르나, 미술제 폐지 결정은 미술 생태계를 파괴하고 시민이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는 반문화·반문명적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울산이라는 도시가 지닌 품격을 뒤로하고, 울산시와 시의회를 넘어 대한민국 문화예술 생태계에 부끄러운 역사로 남을 일이다.

백동민 월간 퍼블릭아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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