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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환의 여행과 건축, 그리고 문화(50)]로마제국의 정통성

기사승인 2020.10.22  21: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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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트리아 ①

   
▲ 비엔나 카를 성당. 바로크 양식의 기반 위에 고대 로마 건축의 여러 요소들을 절충적으로 사용, 합스부르크 왕가의 위세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 루돌프 1세
왕위 오르며 오스트리아 차지 후
고딕양식 성격 충실히 반영시킨
비엔나 중심 ‘슈테판 성당’ 개축
유럽사회 중심 도시로 도약하고
카를성당엔 왕가 위세 담아내며
로마제국 계승하였음을 드러내


비엔나, 귀족들의 호화스런 무도회가 연상되는 도시. 로마제국시대만 해도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 알프스 북부지역은 문명의 변방이었다. 야만족과 이교도들이 득실거리는 변방지역이 어떻게 서구 문명의 주역이 될 수 있었을까? 그 변화는 5세기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시작된다. 서유럽으로 진출한 게르만족은 프랑크왕국을 세웠고, 문명의 중심을 이탈리아 반도에서 중서유럽으로 이동시켰다.

그 왕조의 후손 중에서 샤를마뉴대제는 우리네 광개토대왕쯤 되는 인물이다. 그는 8세기에 유럽으로 침략해온 이슬람세력을 무찌르고 서유럽 일대를 평정했다. 또한 게르만족을 기독교로 개종시켜 로마교회로부터 황제칭호를 받았다. 황제는 교회를 수호하고, 교회는 황제의 세속권력을 인정하는 상호의존적 관계, 이는 ‘서로마제국의 부활’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이후 황제의 관은 여러 다른 가문으로 계승되었지만, 기독교 왕국으로서의 종교적 체제와 로마제국의 후계자라는 정치적 위상은 중세사회 동안 꾸준히 지속됐다.

유럽세계에서 비엔나가 주목받게 된 것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번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2세기까지만 해도 스위스 지방의 작은 영주에 불과했던 이 가문에게 1273년 행운의 여신이 찾아왔다. 이 가문 출신의 루돌프 1세가 제후들이 선거로 뽑는 독일 왕에 등극했고, 이로써 오스트리아 영토를 소유하게 된다. 그의 후계자들은 비엔나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데 정성을 기울였고, 이후 비엔나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근거지가 되어 유럽사회의 중심도시로 도약하게 된 것이다.

비엔나를 국제도시로 탈바꿈하기 위한 노력은 도시 중심에 있는 슈테판 성당을 개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1359년 합스부르크 왕가는 기존의 성당을 고딕식으로 개축하는 공사에 돌입했다. 비엔나의 귀족들은 유럽에서 가톨릭 세계를 수호하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생각했다. 유럽으로 진출하려는 오스만의 이슬람 세력을 막아내는데 최전방에 있었던 비엔나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수호자로서 자부심을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슈테판 성당은 ‘비엔나의 영혼’이라고 부를 정도로 지금도 도시의 상징으로 꼽힌다. 파리의 노트르담, 쾰른의 대성당이 그렇듯이 중세도시로서 랜드마크를 이룬다. 그것은 137m에 이르는 까마득한 높이의 첨탑 때문만도 아니고 청색과 금색 벽돌로 만든 모자이크 지붕의 화려함 때문만도 아니다. 건축적으로는 고딕(Gothic)양식에 해당하는데, 이는 유럽 중세도시의 시대적, 도시적 의미를 포괄하기 때문이다.

고딕양식은 13세기 중세도시의 발전과 로마 교황을 중심으로 제도화한 교회 권력의 확대를 배경으로 발전했다. 로마네스크 양식이 주로 농촌에 기반을 둔 수도원에 적용되었다면, 주교들이 주재하는 도시교회에서는 교권과 정치적 위상을 표현하기 위한 새로운 양식이 등장했다. 로마인들이 야만이라고 생각했던 게르만족들이 로마보다 더 거창하고 신성한 교회양식을 창안한 것이다.

고딕시대에 대성당의 건축은 하늘을 지향하는 종교적 신념과 지상에서 신의 영광을 나타내는 척도였다. 각 도시마다 경쟁적으로 높은 대성당을 짓는데 열성을 아끼지 않았다. 로마네스크 시대에는 바실리카 형식에서 진입부와 성소를 덧붙여 수평적 축을 만들어냈다면, 고딕 시대에는 하늘로 향한 수직적 축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종탑은 물론이거니와 성전의 높이도 갈수록 높아졌다. 성당의 높이는 도시의 신앙적 깊이와 주교의 위상, 경제력과 기술력을 반영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슈테판 성당은 고딕양식의 건축적 성격을 충실하게 반영한다. 하늘로 치솟는 거대한 탑, 천창에서 쏟아지는 신비스러운 빛, 바로 고딕건축의 특징이다. 하지만 측벽의 조소적 골조미나 원형창과 같은 장식은 볼 수 없다. 대신 창호상부를 장식하는 장식격자(tracery)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정교하다. 내부에서도 기둥마다 하부를 장식하는 조소와 회화들이 고딕보다는 바로크의 도시적 맥락을 나타내고 있다.

   
▲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슈테판 성당이 명목상으로 도시에서 교회의 위상을 강조했다면, 카를 성당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위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건축이다. 흑사병이 물러간 것을 감사하는 뜻으로 1716년 착공한 이 성당은 왕가의 위대함을 찬양, 홍보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황실은 바로크 양식의 대가인 건축가 에를라흐(Erlach, 1656~1723)에게 이 일을 맡겼다.

화려하고, 동적이고, 정열적인 바로크 양식은 로마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이는 프랑스로 넘어갔던 유럽 건축양식의 주도권을 로마로 되돌린다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에를라헤는 바로크 양식 만으로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는 바로크 양식의 기반 위에 고대 로마 건축의 여러 요소들을 절충적으로 사용했다.

중심을 강조하는 돔과 로마신전형태의 진입부 처리는 르네상스시대에 이미 사용된 것이다. 하지만 돔의 장식성이나 드럼의 높이, 돔의 비례는 르네상스식 돔과 달리 과장되었다. 로마 베드로 성당 큐폴라의 모방이다. 가장 두드러지는 요소는 돔 양편에 세운 승전기둥이다. 교회건축과 상관이 없는 이 기둥은 로마 베네치아 광장에 서있는 트라얀 기둥의 재현이다. 그 꼭대기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징인 독수리와 왕관을 설치하여 왕가의 영광으로 대치했다. ‘로마제국의 창작적 복원’을 통해 비엔나와 합스부르크 왕가가 로마제국을 계승하였음을 대내외에 천명한 것이다. 신성이 보증하는 왕권의 권위, 비엔나는 그렇게 로마의 후계자가 되어갔다.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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